본문 바로가기

​독서의 찰나 [블루닷 서재 : Book]

그린다는 것은 결국 그리워하는 것이다 (To Draw is, After All, To Yearn)

728x90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내 마음에 스며든 묵향
[바람의 화원]
제목: 바람의 화원
작가: 이정명

오디언 도서관

바람이 머물다 가는 길목에서


가끔은 말보다 눈빛이, 글보다 하나의 몸짓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할 때가 있습니다. 평범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아침,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서 문득 먼지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그 사소한 찰나가, 그날따라 마치 거대한 우주의 질서처럼 정교하게 다가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결을 따라 일렁이는 햇살의 조각들. 우리는 어쩌면 매일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곁에 두고도 눈이 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 길로 오랜만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정명 작가의 소설 '바람의 화원'을 오디오북으로 다시 마주했습니다. 귀로 스며드는 문장들은 창밖의 바람과 겹쳐지며 제 마음에 커다란 잔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책을 열 번도 넘게 거듭해 들으며, 저는 단순히 조선 시대 두 천재 화가의 삶을 훔쳐본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삶의 뜨거운 결을 하나씩 매만지게 되었습니다. 소리로 듣는 고전은 활자보다 더 깊숙이 영혼의 결을 흔드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종이 위에 얹어진 우주, 붓끝으로 피어나는 삶


소설 속 김홍도와 신윤복은 붓 한 자루로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아내던 이들이었습니다. 도화서의 엄격한 규율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결국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온기'였습니다.

김홍도가 거침없는 화풍으로 삶의 억센 활력을 그려냈다면, 신윤복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파격적인 시선으로 세상의 이면을 부드럽게 포착해 냅니다. 그들의 그림은 단순한 잉크의 얼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을 향한 가장 뜨거운 고백이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붓끝이 거친 한지 위를 스칠 때마다 그곳에는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코 마주하는 일상도 어쩌면 이 화가들의 도화지 구석에 그려진 작은 조각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장통의 시끌벅적한 소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노을빛에 물드는 어머니의 야윈 어깨까지, 모든 것이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이는 소중한 그림의 소재였던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사실은 거대한 하나의 걸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는 마음


가장 마음을 울렸던 것은 윤복의 대사였습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 짧은 문장 앞에서 저는 한동안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다시 그리움을 부른다는 그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가장 아름답게 요약한 비유가 아닐까요.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누군가를, 혹은 지나간 어떤 계절을 그리워하며 매일을 채워나갑니다. 그 그리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의 채도 역시 한층 더 짙어지는 법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느낍니다. 억새밭이 한 방향으로 눕고, 나뭇잎이 파르르 떨며, 누군가의 머리칼이 가볍게 날릴 때 우리는 비로소 바람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윤복은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고 싶어 했던 화가였습니다. 잡을 수도 없고 가둘 수도 없는 삶의 가장 순수한 순간, 형태가 없어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감정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그의 몸짓은 그 자체로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예술이었습니다.

마음의 얼룩을 씻어내는 다정한 대화


이 책을 반복해서 들을 때마다 제 안의 굳어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말랑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오랜 친구와 마주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느냐고, 당신의 마음속 도화지에는 어떤 빛깔들이 채워져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 질문은 바쁜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영혼에 건네는 가장 다정한 안부 인사와도 같았습니다.

끝없는 경쟁과 바쁜 일상에 치여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빛깔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에 맞춰 자신을 잘라내고, 남들의 시선에 갇혀 정작 소중한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신윤복이 도화서의 낡은 양식을 과감히 깨부수고 자신만의 거침없는 화풍을 펼쳤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삶을 온전히 그려낼 권리가 있습니다. 조금은 서툴고 비뚤어진 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진심이라면 그 자체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연이라는 이름의 지울 수 없는 잔상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는 더욱 팽팽해집니다. 사제지간을 넘어 서로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던 김홍도와 신윤복, 그리고 그들의 예술을 사랑했으나 끝내 고독했던 임금 정조까지. 그들의 관계를 보며 저는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연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의 도화지에 지워지지 않는 붓 자국을 남기는 일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색이 만나 더 깊고 오묘한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순간입니다.

어떤 인연은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나 마음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또 어떤 인연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처럼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인연의 길이에 있지 않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서로의 영혼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이해했는가, 서로의 삶에 아름다운 빛깔을 물들여 주었는가가 핵심일 것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붓을 쥐어주며 느꼈을 그 온기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오늘이라는 도화지 위에 당신의 빛깔을


오디오북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이어폰을 뺐을 때,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은은한 묵향이 가득 차 있는 듯했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창밖을 맴돌고 있었고, 세상은 아까와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풀꽃 하나도 이제는 신윤복이 밤새 고민하며 그렸을 초충도의 한 장면처럼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매일 아침 '오늘'이라는 이름의 하얗고 깨끗한 도화지를 선물 받습니다. 그 위에 어떤 슬픔을 그리고 어떤 기쁨을 채워 넣을지는 오롯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삶이 때로는 거친 태풍처럼 우리를 흔들지라도, 그 바람조차 나만의 아름다운 화풍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당신이 걷는 그 모든 길 위에, 다정한 바람과 유려한 빛깔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