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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찰나 [블루닷 서재 : Book]

새벽달 아래서 듣는 이순신의 고독, 김훈의 《칼의 노래》를 귀로 읽다 (The Song of the 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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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달 아래서 듣는 이순신의 고독, 김훈의 《칼의 노래》를 귀로 읽다
제목: 칼의 노래
작가: 김훈
오디언 도서관

새벽 5시 반, 고요한 밤의 장막이 걷히고 어스름한 푸른빛이 방 안 가득 밀려드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 적막한 찰나, 베란다 창문을 열면 코끝을 스치는 새벽 공기가 사뭇 서늘합니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힘을 잃어가고, 서쪽 하늘 끝자락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새벽달이 하얗게 바래 가고 있습니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이 고요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문득 내 삶이 참 작고 미미하다는 쓸쓸한 생각이 밀려들곤 합니다.

그 밀도 높은 적막 속에서 저는 최근 ‘오디언 도서관’을 통해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칼의 노래》를 다시 귀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종이책의 사각거리는 책장을 넘기며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날카롭고 서늘한 감각이 귓가를 타고 온몸으로 번져왔습니다. 성우의 나직하면서도 단단한, 마치 마른 장작이 타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이순신의 고독은, 차가운 새벽 공기 그 자체를 닮아 있었습니다.

이미 열 번을 넘게 읽고 또 귀로 들은 익숙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매번 첫 문장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옥죄어 오는 것은 참 모를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치열한 문장들 속에서 완벽하게 박제된 영웅의 모습이 아닌, 우리와 똑같이 매 순간 흔들리고 고뇌하며 끝없이 아파하는 ‘인간 이순신’의 지독한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 속 이순신은 역사 교과서가 예찬하는 화려하고 빈틈없는 영웅의 외투를 스스로 벗어던진 채, 오직 무거운 칼 한 자루의 무게를 온 생애로 버텨내는 지극히 외로운 인간으로 서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하고 무자비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금의 불신으로 백의종군을 하고, 마침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차가운 총탄을 맞고 전사하기까지의 2년여의 시간. 그의 좁은 어깨 위에 얹어진 것은 사직의 보존과 한 나라의 운명이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가혹한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가 김훈이 돋보기로 비추듯 포착해 낸 것은 승전고를 울리는 화려한 환호성이 결코 아닙니다. 전쟁터의 자욱한 화약 먼지와 피비린내 뒤에 숨겨진 인간 이순신의 깊은 고뇌와 번뇌, 그리고 혈육을 잃은 아비의 찢어지는 심정과 권력의 지독한 덧없음입니다.

책의 구절구절을 소리로 음미하다 보면, 이순신을 둘러싼 세상이 얼마나 잔인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는 밀려드는 왜적들의 서슬 퍼런 칼날보다, 자신을 시기하고 끊임없이 의심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조정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더 깊은 절망을 맛봅니다. 또한 눈앞에서 낙엽처럼 스러져가는 무고한 병사들의 죽음 앞에서 철저하게 무력해집니다.

특히 그의 셋째 아들 이면이 고향 아산에서 마을로 쳐들어온 왜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다 처참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대목에서는 숨이 턱 막힙니다. 조선의 바다를 호령하던 삼도수군통제사는 방 안에서 홀로 코피를 쏟으며 소리 죽여 오열합니다.

뼈가 녹아내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차가운 전장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슬픔의 깊이를 감히 그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디언 도서관의 나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사소하고 고단한 순간들을 겹쳐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싣는 만원 버스의 뿌연 차창 밖 풍경,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어스름한 퇴근길 가로등 불빛 아래 축 처진 채 걸어가는 이웃들의 쓸쓸한 어깨, 그리고 깊은 밤 홀로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 말입니다.

비록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눈앞의 거창한 전쟁은 아닐지라도, 우리 역시 저마다의 삶이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날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칼을 쥐고 위태롭게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받고, 관계의 본질적인 덧없음에 뼈저리게 외로워하면서도, 내일의 생계와 가족을 위해 또다시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는 우리 모두가 어쩌면 저마다의 무대를 외롭게 지켜내는 또 다른 이순신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홀로 떠나는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칼의 노래》는 그 지독한 고독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라고 달콤하게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차가운 고독의 밑바닥을 똑바로 응시하고, 주어진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이순신을 마음속에 품고 묵묵히 바라보던 관기 여진과의 짧고 애틋한 인연, 그리고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보좌하던 군관 김수철과의 신뢰는 거대한 전쟁의 역사 앞에서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부질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소하고도 애틋한 인간적인 인연들이 징검다리가 되어주었기에, 그는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온기를 끝까지 잃지 않고 그 지옥 같은 전장을 묵묵히 버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고 가혹한 현실의 벽이 사방을 가로막아 숨이 막힐 것 같은 절망감이 울컥 밀려올 때, 저는 이 소설이 그려낸 이순신의 단호하고 서늘한 뒷모습을 가만히 복기해 봅니다. 그는 세상의 부질없는 평판이나 권력의 허망한 덧없음에 결코 흔들리거나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오늘 당장 마주한 눈앞의 적을 향해 묵묵히 자신의 칼을 겨눴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벌판 속에서도 아무런 원망 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땅속 깊이 묵묵히 뿌리를 내리는 한 그루의 서늘한 나무와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본질 또한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거창하고 먼 미래의 성공만을 쫓으며 오늘을 허비하기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소박한 하루라는 전장을 묵묵히, 그리고 가장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내 곁에서 함께 비를 맞아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거친 손을 한 번 더 따뜻하게 감싸 쥐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이라는 엄숙한 무대를 대해야 하는 가장 아름답고도 존엄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던 붉은 노을이 가고 이윽고 깊은 밤의 어둠이 내리면, 어김없이 하늘에는 저마다의 빛을 품은 별들이 하나둘 돋아날 것입니다. 아스라이 멀리서 반짝이는 그 작은 빛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오늘도 제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유약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우리 모두가 삶의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을 만나더라도 자신만의 소중한 북극성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각자가 가진 칼의 노래를 매일 당당하게 불러나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고독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우리의 아름다운 여정을 위해, 오늘 밤은 마음에 차분하고 따뜻한 등불 하나를 가만히 켜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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